《모나리자》와 《절규》가 사라졌을 때 미술관에 남은 것은 빈자리였다. 1911년과 1994년의 두 도난은 방법도 시대도 달랐지만, 빈 벽을 보러 온 사람들과 이어진 보도가 작품의 이름을 더 넓게 퍼뜨렸다는 점에서 닮아 있다.

핵심 도난은 작품의 물리적 이동에 그치지 않았다. 빈 벽과 보도 사진, 공개 수사가 그림을 대중문화의 주인공으로 바꾸었다.

모나리자와 절규는 어떻게 미술관 밖으로 사라졌나
《모나리자》, 16세기 초, 루브르 박물관 소장. 본문에서 다루는 도난 사례 작품 레오나르도 다 빈치 · Public domain · Wikimedia Commons 원본 · 권리 표시 확인 2026-08-09 · 아트북클립이 웹 게재를 위해 크기를 조정하고 WebP로 변환했습니다.

먼저 보면 좋은 점

  • 1911년 빈첸초 페루자가 루브르에서 모나리자를 빼낸 경로를 따라간다.
  • 빈 벽을 보러 온 관람객과 국제 보도가 작품의 명성에 미친 영향을 본다.
  • 1994년 오슬로 국립미술관 절도와 회수 작전이 달라진 보안 환경을 보여 준다.

월요일 아침, 루브르의 빈자리

1911년 8월 21일, 루브르에서 일한 적이 있던 이탈리아인 빈첸초 페루자는 미술관이 문을 닫는 월요일에 《모나리자》를 벽에서 내렸다. 액자와 보호 유리를 벗긴 뒤 그림을 옷 아래 숨겨 건물을 빠져나갔다. 다음 날 빈 벽이 발견되기 전까지 부재는 제대로 인식되지 않았다.

수사는 국경을 넘어 확대됐고 시인 기욤 아폴리네르가 체포되거나 피카소가 조사를 받는 등 엉뚱한 의심도 이어졌다. 관람객은 그림 대신 네 개의 못 자국이 남은 자리를 보러 몰렸다. 이미 알려진 작품이었지만 도난 보도는 얼굴을 세계적인 뉴스 이미지로 바꾸었다.

피렌체에서 끝난 애국자의 주장

페루자는 2년 넘게 파리 숙소에 그림을 숨겼다. 1913년 피렌체의 미술상 알프레도 제리에게 작품을 팔려다 붙잡혔고, 그림을 나폴레옹에게 약탈당한 이탈리아로 돌려주려 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레오나르도는 프랑스로 건너갈 때 작품을 직접 가져갔던 것으로 이해되므로 그 명분은 역사와 맞지 않는다.

회수된 《모나리자》는 이탈리아에서 잠시 전시된 뒤 루브르로 돌아갔다. 도난과 귀환의 서사는 작품의 미소만큼 강한 부가 이야기가 되었고, 미술관은 이동과 출입을 관리하는 방식을 강화했다.

절규를 가져간 사다리

1994년 릴레함메르 동계올림픽 개막일, 도둑들은 오슬로 국립미술관 외벽에 사다리를 놓고 창문을 깨 《절규》의 1893년 버전을 가져갔다. 범행은 매우 짧았고 보안이 허술하다는 조롱 섞인 쪽지를 남겼다는 이야기도 알려졌다. 노르웨이 경찰은 영국 수사관들과 함정 작전을 벌여 같은 해 작품을 회수했다.

두 그림은 무사히 돌아왔지만 사건의 교훈은 단순한 해피엔딩이 아니다. 명작의 시장 가치는 공개 판매가 어렵게 만들면서도 상징적 표적으로 만든다. 오늘날 작품 보안은 액자와 경보 장치뿐 아니라 운송 기록, 영상, 국제 공조까지 포함한다. 빈 벽이 만든 관심이 작품을 더 유명하게 한다는 역설도 여전히 남는다.

사실 확인 자료

본문은 아래 미술관·소장기관의 공개 자료를 확인해 아트북클립이 독립적으로 작성했습니다.